KPOP스타를 꿈꾸는 일본인에게① : 일본대중문화개방과 한국대중문화산업의 발전 / K-POPスターを目指す日本人へ①:日本大衆文化の開放と韓国大衆文化産業の発展

국제교류와 한일교류도 흐르는 방향이 바뀌고 그 흐름 속에 섞여가는 것들도 바뀐다.  나는 20대에 일본의 이바라키현에서 8년간 유학을 했는데 동네 슈퍼에서 바나나를 처음 먹었다. 바나나는 부자집 아이들이 소풍가는 날에  담임선생님에게 몰래 낱개로 선물하는 귀한 과일이었다. 나는 일본의 슈퍼에서 바나나를 한다발 사서 상처나지않게 조심스럽게 자전거에 싣고 기숙사방으로 가져와서 먹었다. 대학교 기숙사 방에서 낡은 TV를 통해 접한 세련된 대중문화는 내가 일본에 유학온  이유를 찾기에 충분했다.  입학허가서와 무거운 가방 4개를 들고 나리타공항에 내려 전철과 노선버스를 갈아타면서 기력을 다해 찾아간 고생에 대한 보상이었다.  밤마다 일본 테레비를 탐미했고 머지않아 아이돌 인형 Wink의 팬이 되었다. 일본경제는 최고조의 버블호황이었고 한국의 대중문화와 TV프로그램은 일본의 TV와 가요를 베껴쓰는 수준이었다.  

国際交流と日韓交流も、流れる方向が変わり、その流れの中にあるものも変わる。私は20代の頃、茨城県で8年間留学をしたのだが、地元のスーパーでバナナを初めて食べた。当時の韓国では、バナナは裕福な家庭の子供が、遠足の日、担任の先生にこっそり1本プレゼントをするような貴重な果物だったのだ。スーパーでバナナを1房買い、傷がつかないよう慎重に自転車に乗せ、学生寮の部屋で食べた。学生寮の部屋にある古びたテレビから流れてくる洗練された日本の大衆文化は、私が留学する理由を求めるには十分だった。入学許可書と重いかばんを4つ持ち、成田空港から電車と路線バスを乗り継ぎながら、苦労して訪れたことに対するご褒美だった。毎晩、日本のテレビ番組に陶酔し、すぐに人形のように可愛いWinkのファンになった。日本経済はバブル経済の絶頂期で、韓国の大衆文化とテレビ番組は、日本のテレビ番組の歌謡を真似ているレベルであった。

한국의 군사독재정권은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었고 내가 일본에 유학한 첫해에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98년 가을에 한국정부가 '일본대중문화개방'을 선언했다. 

그렇다. 1998년 10월까지  한국에서 한국인이 일본의 만화를 보거나 일본대중가요를 부르는 것은 법률로 금지되어 있었다. 1998년 10월 김대중대통령이 일본대중문화개방을 선언했을 당시의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의 80% 이상이 반대했다. 한국의 문화예술계를 비롯하여 각계에서는 성급한 문화개방 선언을 취소하라는 성토와 거리데모가 이어졌다. 당시 일본의 대중문화는 한국의 대중문화를 그야말로 압도하는 것이었다. 지극히 세련되게 다듬어진 것이었고 뇌쇄적인 매력으로 가득한 일본문화가 들어오면 어수선한 한국의 대중문화는 속수무책으로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그러나 각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대중문화는 단계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했고, 동시에 한국정부는 한국의 대중문화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대책을 문화예술계와 협의체를 통해서 빠르게 마련했고 예산지원을 했다.    

韓国の軍事独裁政権はほぼ終わりに差し掛かかっていた頃で、私が日本に留学に来て1年目にソウルでオリンピックが開催された。それから10年が経った1998年の秋、韓国政府が「日本大衆文化開放」を宣言した。そうだ。1998年10月まで、韓国では韓国人が日本の漫画を見たり、日本の大衆歌謡を歌うことは法律で禁止されていた。1998年10月、金大中大統領が日本の大衆文化開放放を宣言した当時の衝撃は実に大きいものだった。世論調査で80パーセント以上の韓国人が反対をした。文化芸術界を始めとして、各界からは性急な文化開放宣言を中止しろという糾弾と路上デモが起こった。当時、日本の大衆文化は韓国の大衆文化をまさに圧倒していた。非常に洗練されていて、悩殺的な日本文化が入ってくれば、まだ日本を真似している段階で整っていない韓国の大衆文化は為す術もなく吸収され、跡形も無く崩れていくということは明らかだった。しかし、各界の反対をよそに日本大衆文化は段階的に輸入され始め、同時に韓国政府は韓国の大衆文化を守るために様々な政策を文化芸術界と協議体を通じて急ピッチで準備をし、予算支援をした。 

한국정부는 2000년부터 첨단 영상방송 제작기반을 확충했고 독립제작사 및 전문 프로덕션의 디지털화를 지원했다. 한국 영화의 국내시장 점유율을 40%이상으로 안정적으로 확보해주었고 2003년까지 100편이상이 제작되도록 지원했다. 또한 음악산업의 효율적 육성을 위한 체제를 구축했고, 전국의 4년제 대학에 애니메이션학과와 게임학과를 만들게 하여 애니메이션산업을 창작중심의 산업구조로 전환시켰다.  4단계 개방으로 일본대중문화가 완전히 개방된 것은 2004년 1월이었고 놀랍게도 짧은 동안에 한국의 대중문화산업은 빠르게 일본을 따라잡았다. 당시 한국사회에는 "근대화에 뒤져서 일본의 식민지가 됐지만 정보화에는 앞서간다" 라고하는 표어가 유행했다. 한일축구전에서 보야주듯이 "일본을 이기자" 라는 표어는 한국인 모두를 뜨겁게 한다.      

나는 일본유학과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1996년 귀국하여 한국정보화진흥원(NIA) 연구원과 국가정보원(NIS) 그리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면서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한국의 정보화를 위한 물리적 제도적 건설과 정비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은 기억한다. 내가 한국정보화진흥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추진했던 일이 바로 국가정보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콘텐츠의 발달과 전파는 바로 정보화를 그 기반으로 한다.  한국은 일본을 앞서기 위해서 대중문화예술의 고속도로를 건설한 것이다.     

韓国政府は2000年から先端映像放送制作基盤を拡充し、独立制作会社及び専門プロダクションのデジタル化を支援した。韓国映画の40パーセント以上の国内市場シェアを安定的に確保し、2003年まで100本以上が制作されるよう支援した。また、音楽産業の効率的な育成のための体制を構築し、全国の4年制大学にアニメーション学科とゲーム学科を新設し、アニメーション産業を創作中心の産業構造に転換した。4段階の開放を経て、日本大衆文化が完全に開放されたのは2004年1月で、驚くべきことに、この短期間で韓国の大衆文化産業は日本にあっという間に追いついた。当時、韓国社会には「近代化に遅れを取り日本の植民地となったが、情報化では追い抜く」という標語が流行していた。サッカー日韓戦で見せたように「日本に勝とう」という標語は全ての韓国人を熱くさせた。

私は日本留学とアルバイトを終え、1996年に帰国し、 韓国情報化振興院(NIA)の研究員と国家情報院(NIS)、そして韓国外国語大学で教授として勤務をし、息苦しい日々を過ごしていたのだが、韓国の情報化のための物理的、制度的な建設と装備が大々的に行われていたということは覚えている。私が韓国情報化振興院で専任研究員として進めていたことが、まさに国家情報化事業だったからだ。大衆文化コンテンツの発達と浸透は、情報化を基盤としていた。韓国は、日本を抜くために大衆文化芸術の高速道路を建設したと言える。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총리가 1998년 10월8일 일본 도쿄도 구 아카사카 영빈관에서 한일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악수하고 있다(아사히신문). / 金大中元大統領と小渕恵三元首相が1998年10月8日、東京都の迎賓館赤坂離宮で日韓共同宣言に署名している(朝日新聞).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총리가 1998년 10월8일 일본 도쿄도 구 아카사카 영빈관에서 한일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악수하고 있다(아사히신문). / 金大中元大統領と小渕恵三元首相が1998年10月8日、東京都の迎賓館赤坂離宮で日韓共同宣言に署名している(朝日新聞).

그리하여 우려했던 것과는 반대로 일본대중문화개방 이후에 오히려 한국의 문화콘텐츠가 일본으로 수출되는 흐름이 두드러졌다. 게임산업, 웹툰, KPOP 등이다. 2017년 현재 한국에서 일본으로 수출되는 콘텐츠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수입되는 수출액보다 훨씬 높아졌다. 2021년 기준 콘텐츠산업조사에 따르면 영화, 애니메이션, 방송 등을 비롯한 K-콘텐츠의 2021년 일본 수출액은 18억 달러로 일본 문화콘텐츠의 한국내 수입액인 1억2000만 달러보다 약 15배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そのようにして、懸念とは裏腹に、日本の大衆文化開放以降、むしろ韓国の文化コンテンツが日本に輸出される動きが大きくなった。ゲーム産業、ウェブトゥーン、K-POPなどだ。2017年時点、韓国から日本に輸出しているコンテンツが、日本から韓国に輸入している金額よりも明らかに高くなった。コンテンツ産業調査によると、2021年時点で、映画、アニメーション、放送などをはじめとした韓国コンテンツの対日本輸出額は18億ドルで、日本文化コンテンツの対韓国輸入額である1億2000万ドルよりも約15倍高い。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지만,  한국의 대중문화는 일본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1차한류는 겨울연가가 히트를 친 2004년에 시작됐다.  동방신기, 카라, 소녀시대가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2000년대 후반을 2차한류라고 말할 수 있다.  트와이스와 BTS가 인기를 끈 2010년대의 3차한류 시기에는 일본에서 치즈닭갈비 등의 음식도 유행하였다. 코로나팬데믹 시기에는 '사랑의 불시착'  OTT중심으로 퍼진 4차한류 시기이다. KPOP 뿐 아니라 패션, 음식, 과자, 인테리어 등 일본인들의 일상전반에서 한국문화가 소비되고 있다.  

2003년 12월 16일 아시아희망캠프기구는 서울에서 '제4차 일본문화개방과 한일문화교류의 전망' 이라는 주제로 한일관계자가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NHK 겨울연가의 책임프로듀서와 양국의 정책담당자, 연구자들이 격변하는 한일교류에 대해 원인을 분석하고 한일관계의 미래를 전망했다. 초난강도 초대했다. 

なぜこうなったのかはわからないが、韓国の大衆文化は日本を追い越し始めた。第1次韓流ブームは、冬のソナタがヒットした2004年に始まった。東方神起、KARA、少女時代が日本で活発に活動していた2000年代後半を第2次韓流ブームと呼ぶ。TWICE とBTSが人気となった2010年代の第3次韓流ブームの際は、日本でチーズタッカルビなどの韓国料理も流行った。新型コロナパンデミックの時期は、「愛の不時着」など動画配信サービスを中心に広がった第4次韓流ブームが起こった。K-POPだけではなく、ファッション、食べ物、お菓子、インテリアなど、日本人の生活全般で韓国文化が消費されている。2003年12月16日、アジア希望キャンプ機構はソウルで「第4次日本文化開放と日韓文化交流の展望」というテーマでシンポジウムを開催した。 NHK「冬のソナタ」のチーフプロデューサーと両国の政策担当者、研究者が激変する日韓交流について原因を分析し、日韓関係の未来を展望した。草彅剛氏も招待した。

2004년 '욘사마'를 찾아서 많은 일본인 중년여성들이 한국을 방문했고 2005년 대장금이 한류 인기를 이어갔다. 연예계와 관계없이 살아온 나도 겨울연가에서 아버지 역을 연기했던 정동환 배우와 후쿠시마에서 3박4일간 승용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여행하는 일이 있었다.  그때까지 '한류'는 어쩌다 생긴 '행운'이고 '한류'라고 하는 중국산 조어(造語)가 세상에 정착될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일본대중문화를 개방해서 받아준 한국에 주는 일본인들의 '선물'이라고 여겼다. 한류는 곧 끝나고 한국인도 다시 일본문화를 즐기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뭐든 치밀하게 계획하는 일본인이니까 본격적인 문화침략을 하기에 앞서 한국인을 안심시키기 위한 전략이라는 음모론이 설득력 있게 발표되기도 했다.    

2004年、「ヨン様」を追いかけていた日本人中年女性たちは韓国を訪れ、2005年、「宮廷女官チャングムの誓い」が韓流の人気を引き継いだ。芸能界とは無縁だった私も、「冬のソナタ」で父親役を演じたチョン・ドンファン氏と、福島で3泊4日の間、乗用車の後部座席に並んで座って旅行する機会があった。その当時まで「韓流」は偶然起こった「ラッキー」なことであり、韓国が日本大衆文化を開放して、日本人がくれた「プレゼント」のようなものだと思われていた。韓流という中国産造語が世の中に定着するとは想像もしなかった。韓流はすぐに終わり、韓国人は再び日本文化を楽しむだろうと思っていた。日本は何でも緻密に計画するため、本格的な文化侵略の前に韓国人を安心させるための戦術だという陰謀論が説得力をもって提唱されたこともあった。

그런데 욘사마와 대장금으로 시작된 한류의 불씨는 KPOP으로 옮겨 붙으면서 더 이어졌고 그 불길은 점점 폭발적이었다. 다양한 국제교류와 한일교류 프로그램을 해오던 아시아희망캠프기구는 심포지움 뿐 아니고 현장으로 나가기로 했다. 2015년부터 KPOP캠프를 시작했다. 매번 만석이었다. 2개월마다 한번씩 실시했고 참가자는 매번 50명을 넘었다. 2016년 8월에 아코피아에 유학온 야마쿠치마코가 서울에서 개최된 JYP오디션을 보고싶다고 해서 아코피아의 일본인사원이 오디션 장소에 데려갔는데 JYP연습생으로 합격했다.

ところが、ヨン様と「宮廷女官チャングムの誓い」で始まった韓流の火種はKPOPに移り、その炎はますます大きくなっていった様々な国際交流と日韓交流プログラムを行ってきたアジア希望キャンプ機構は、シンポジウム(議論)だけでなく現場へ出ていくことになった。2015年からK-POPキャンプを始めた。毎回満席だった。2カ月に1回行い、参加者は毎年50人以上だ。2016年8月にアコピアスクールに留学していた山口真子さん(当時中学生)がソウルで開催されたJYPオーディションを受けたいということだったので、アコピアの日本人社員がオーディション会場へ案内しオーディションを受けて合格した。

트와이스, 블랙핑크, BTS에 이르러서는 KPOP은 완전히 하나의 장르를 이루었고 자리를 굳히게 된 느낌이다.  참고로 KPOP음악의 가시효과는 대단하지만 한국의 컨텐츠 수출액 중에서 그 비중은 의외로 크지 않다.  금액면에서는 게임산업이 거의 70%를 차지하여 가장 비중이 크다.      

TWICE、BLACKPINK、BTSに至ってはK-POPは1つのジャンルとなり、その立ち位置を固めたように思う。ちなみにK-POPの可視的な効果は目を見張るものがあるが、韓国のコンテンツ輸出額に占める割合は意外と大きくない。金額面ではゲーム産業が70パーセント近くを占めており、割合が最も大きい。

한국에서 대중문화예술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게 된 결정적인 기반은 2014년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의 제정이다. 국가기관으로서 한국에는 있는데 일본에는 없는 것이 2가지 있다. 여성부(女性省)와 국가인권위원회이다.  그래서 여성의 지위는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높다. 대중문화예술업이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티스트가 폭력으로부터 보호되고 피난처가 확립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연예업계에는 그 두가지가 법률로 보장되어 있고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 일본은 어떤지 2009년 3월 사망한 장자연이 남긴 문건을 통해 권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 정황이 드러났다. 장자연 사망 직후 타다남은 이 문건이 공개되면서 장자연이 입은 구체적인 피해 사례가 알려졌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실화가 밝혀지면서 전국민의 관심과 신경은 자살한 여배우가 자필로 남겨놓은 '장자연리스트'에  집중됐고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불특정의 인사들이 용의선상에 지목되었다가, 2009년 3월 경찰은 12명을 용의선상으로 지목하였다. 용의자 12명은 방송PD, 언론 관계자 등이었고 성상납, 술접대, 골프접대 등의 행위와 관련된 강요죄 혐의였다. 2009년 3월부터  2019년 5월까지 10년간 한국의 연예업계를 흔들었고 그 사이에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과 전속연예인 표준계약서가 만들어졌다.  이 두가지도 일본에는 없고 한국에는 있는 것이다.   

韓国で、大衆文化芸術産業が飛躍的に発達した決定的な基盤は、2014年の大衆文化芸術産業発展法の制定だ。韓国にあって、日本には無い国家機関は2つある。女性省と国家人権委員会だ。従って、女性の地位は日本よりも韓国で高い。大衆文化芸術産業が健全に発展するためには、アーティストが暴力から保護され、逃げ場が確保される必要がある。韓国の芸能界にはこの2つが法律で保証されており、実際に作動している。2009年3月に自殺したチャン・ジャヨン氏が残した文書を通じ、権力による性暴力被害が明らかになった。チャン・ジャヨン氏の死亡の直後、燃え残った文書が公開され、チャン・ジャヨン氏が受けていた詳細な被害が明らかになった。小説よりも小説のような実話が明らかになり、全国民の関心は自殺した女優が自筆で残した「チャン・ジャヨンリスト」に集中し、韓国を揺るがした。あらゆる人物が容疑者として名前が挙がったが、2009年3月、警察は12人を容疑者とした。容疑者12人は放送プロデューサー、メディア関係者などで、性接待、酒を伴う接待、ゴルフ接待などの行為と関連した強要罪容疑だった。2009年3月から2019年の5月まで10年間、韓国の芸能業界を揺るがし、その間に大衆文化芸術産業発展法と専属芸能人標準契約書が作られた。この二つ(アーティストを保護する法律と標準契約書)も韓国にあって日本には無いものである。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은 대중문화예술인의 자살은 일반인의 자살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문제에서 비롯된 측면이 많지만, 정상적으로 누릴 수 없는 사생활, 인터넷의 비난과 욕설, 불안정한 직업 환경, 극심한 감정노동 등 직업 특수성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으며, 사회적 이슈가 되어 청소년 등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에서 정책적 지원의 필요성이 있다고 국회가 판단을 한 것이다.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이 제정되고 개정을 거듭하면서 2023년 현재 한국의 연예업계는 아티스트와 소속회사가 동등한 관계가 되었고 재판을 하게 되면 아티스트가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어 있다. 2023년 현정부(문화관광부)에서는 '연예인 표준계약서'가 아티스트에 편파적으로 유리한 것이라는 의견으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大衆文化芸術産業発展法は、大衆文化芸術人の自殺は一般人の自殺と同じように個人的な問題 から発生する場合が多いものの、正常に過ごすことができない私生活、インターネット上の誹謗中傷、不安定な職業環境、過激な感情の労働など、職業の特性に起因した側面から社会問題となり、青少年などに与える影響が大きいという点において、政策的な支援が必要だと国会が判断をした。大衆文化芸術発展法制定後、改正を重ね、2023年現在、韓国の芸能界はアーティストと事務所が対等な関係となり、裁判になるとアーティストが有利な立場になった。2023年、現政権(文化観光部)では「芸能人標準契約書」がアーティストに過度に有利だという意見を受け、再検討が行わ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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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예술인(가수중심) 표준전속계약서
대중문화예술인(가수중심) 표준전속계약서(20181128 제정).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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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또는 연습생) 표준 부속합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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